태영호 의원,홍범도 흉상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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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성기자 작성일23-10-30 17:46 조회869회 댓글0건본문
[추적사건25시 김경성 기자]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 홍범도 흉상 ,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해야 하는 이유
- 사회주의자였던 홍범도 , 국군뿌리 될 수 없어
현재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독립운동가 흉상 중에서 홍범도 흉상만은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본다 .
물론 홍범도가 일본군과 싸운 공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그래서 나는 홍범도 유해를 대한민국으로 모셔와 대전현충원에 모신 것을 환영했다 . 그렇다고 사회주의자였던 그를 단지 일본군과 싸운 공로가 있다는 이유로 우리 국군의 뿌리로 보아서는 안 된다 .
지금 남과 북의 대결은 이념 · 체제 대결이다 . 이러한 대결의 전초선에 서 있는 우리 군 지휘관들을 키워내는 교육기관에 홍범도 흉상을 세워 놓고 생도들이 경의를 표하게 하는 것 자체가 우리 국군의 정체성을 흔들고 생도들에게 혼선을 줄 수 있다 .
그의 행적을 보면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고 소련군에 복무했다 .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미국 , 중국 등에서 나라가 독립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으나 그는 생의 말기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소련 영토였던 카자흐스탄에서 생을 마감했다 .
소련 공산당 주도의 자유시 참변에서 홍범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논란거리다 .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들에는 이념적으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공산주의자들도 계파로 갈라져 있었다 . 소련 공산당은 독립군 부대들을 철저히 소련 공산당의 휘하에 넣으려 했고 이에 반기를 든 사람들을 숙청한 것이 바로 자유시 참변이다 . 북한에서는 흑하사변이라고 한다 .
당시 독립군과 소련군 사이 전투에서 홍범도가 소련군 편에 서서 독립군 동지들을 사살했는지는 증명된 것이 없다 . 일부 자료들은 홍범도가 휘하 장교들과 인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자료도 있다 .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독립군에 대한 군사재판에 재판 위원으로 참여했다 . 이에 대해 홍범도가 재판에 회부된 독립군 부대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판관으로 참석한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도 있다 .
동시에 재판위원 참여 후 홍범도가 레닌을 만나 재정지원을 받고 권총을 받은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 그래서 자유시 참변 후 상해임시정부의 여러 사람들이 홍범도를 배신자라고 규탄했고 일부는 홍범도 살해 시도까지 했었다 .
자유시 참변 후 만주에서 독립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의 주도권이 자유우파로부터 소련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로 옮겨 갔다 .
소련 공산당은 우리의 항일투쟁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반 ( 反 ) 나치 저항운동 때도 소련 공산당과 반대에 서있는 진영은 철저히 숙청했다 . 대표적인 예가 1944 년 8 월 폴란드 바르샤바 봉기이다 . 당시 소련군이 바르사뱌 근처에 오자 바르사뱌에 있는 자유우파가 지도하는 지하 국가는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다 . 그러나 소련군은 오히려 진격을 멈추고 나치군이 폴란드 자유우파군을 전멸할 때까지 기다렸다 . 이렇게 소련 공산당은 다른 나라들을 철저히 예속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
자유시 참변도 그런 견지에서 바라봐야 하며 우리 민족의 비극 중의 비극이다 .
물론 홍범도가 활동할 당시 독립군의 힘이 일본보다 열세였기 때문에 일본에 맞설 타국의 힘을 빌어야 한다는 현실론을 홍범도가 따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홍범도를 비롯한 사회주의계 인사들에게는 그 대상이 소련이었다 . 그러나 반대의 길을 걸은 사람들도 있었다 . 이승만 등은 외교독립을 통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이끌어들이는 것을 해결책이라고 믿었고 김구 선생 같은 분은 상해에서 열심히 독립운동을 했다 .
우리 국군의 뿌리를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에게서 찾아야지 , 홍범도 같은 사회주의계열 인사를 국군의 뿌리에 넣으면 안 된다 . 6·25 전쟁이 김일성이 소련의 지원으로 일으켰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소련 군복을 입은 사람의 흉상을 사관학교에 세우면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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