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기업, 돈, 은행-펀드에 묻어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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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류재복 작성일 15-03-12 13:25본문
경남 김해시에 있는 섬유가공업체 A사는 지난 3∼4년 동안 신입 직원을 한 명도 뽑지 않았고 공장에 새 기계를 들여놓지도 않았다. 그 대신 한 해 10억∼20억 원에 이르는 영업이익을 대부분 은행 예금에 넣거나 펀드에 투자했다. 최근 원유 가격이 바닥을 치기 전까지는 원자재펀드 투자로 쏠쏠한 이익도 냈다. A사의 사장은 "향후 사업 여건이 어찌 될지 모르는데 사람을 더 뽑고 사업을 확장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그냥 은행이나 펀드에 돈을 묻어 두고 있다"고 말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가계와 기업들이 돈을 장롱이나 금고에 쌓아 두면서 한국 경제의 '장롱경제화' 현상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경제의 혈관이 막혀 구석구석에 돈이 적체돼 제대로 돌지 않으면서 인구 고령화처럼 자본의 순환 구조도 늙어가는 '돈의 노화(老化)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11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통화승수는 올해 1월 18.5로 한은이 현재의 물가안정목표제를 시작한 1998년 이후 최저치를 나타냈다. 통화승수란 한은이 금융회사에 공급한 돈에 비해 시중 통화량이 얼마나 증가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통화승수가 낮다는 것은 그만큼 돈이 잘 돌지 않는다는 의미다.
돈의 흐름이 막히는 것은 가계가 소비를 안 해서 물건 값이 싸지고, 기업들은 물건을 팔아도 남는 이익이 적어 생산에 필요한 설비투자를 주저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장기화하면 경기 침체와 물가 하락이 꼬리를 물고 반복되는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의 가능성이 커진다. 기업들은 투자를 하지 않아 쌓이는 유보금을 A사처럼 저금리 금융상품에 넣어 방치하고 있다. 지난해 말 현재 기업예금 규모는 321조 원으로 2005년(150조 원)의 두 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부와 한은이 재정지출 확대, 기준금리 인하로 시중에 아무리 돈을 풀어도 실물경기는 나아지지 않고 자산시장 거품(버블)만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경제 불확실성이 높고 마땅한 투자처도 없다 보니 돈이 장롱 속이나 지하경제로 잠기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류재복 대기자]